이종근

"침묵하지 말자!"소리내어 전하자.

1. 일본으로 건너가신 부모님

저의 부모님(아버지 이학기, 어머니 정점봉)께서는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의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계셨습니다. 유복한 농가였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1910년에 한일합병으로 일본은 조선을 강점했습니다. 일본 강점이 시작되기 전부터 한반도에는 많은 일본인이 들어와 있었는데, 일본 강점 이후에 더 많은 일본인이 조선으로 이주해 왔습니다. 1945년 해방 당시, 70~90만 명이라는 일본인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합니다.

한일합병 이후, 일본은 농민들이 힘들게 농사지은 농작물의 대부분을 공출해 갔습니다. 그리고 측량법이라는 법률을 제정해서 등기되어 있지 않은 농경지를 압수해 갔습니다. 그때까지 그 농경지에서 농사지으며 살던 농민들은 고용 소작인으로 전락했습니다. 일본인은 조선의 미술품 같은 것들도 많이 약탈해 갔습니다.

부모님께서 사시던 마을에는 마을이 작아서인지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사시던 마을 가까이에 조금 큰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로 이주해 온 일본인이 순사를 데리고 와서 마을 주민의 닭이나 돼지를 강제로 빼앗아 갔다고 합니다. 순사가 총칼을 들이댔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저항할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조선에서는 청자나 백자로 된 요강을 각 방에 두고 변기로 쓰고 있었습니다. 한 집에 몇 개씩 요강을 가지고 있었는데, 용변을 본 후에는 씻어서 소나 돼지 외양간에 엎어서 말렸습니다. 그 요강이 일본인들에게는 고가의 도자기로 보였는지 훔쳐 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요강을 도난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무서워서 쫓아가 뺏어 오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요강은 장날이 아니면 살 수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요강을 새로 장만할 때까지 용변을 보지 못해 무척 불편을 겪었다고 합니다.

농사지으며 살던 부모님의 생활이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1920년, 아버지께서는 아내와 딸을 고향에 남겨둔 채 일하기 위해 혼자서 일본으로 건너가셨습니다. 당시 부모님 슬하에는 아들 하나와 여자아이 쌍둥이가 태어났습니다만, 아들과 쌍둥이 딸 중의 한 명이 죽고 딸 하나만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가신 곳은 시마네현[島根県] 미노군[美濃郡] 히키미초[匹見町](현재는 마스다시[益田市]에 편입됨.) 였습니다. 그곳에는 약 2천 명의 조선인들이 목탄(*[1])을 만들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생활이 조금 안정되자, 1925년에 어머니와 누나도 일본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1]) 당시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군수물자나 군인의 이동이 많았는데, 이동에 필요한 연료로 목탄을 많이 만들어야 했습니다. 일본인 남성은 모두 전쟁터에 나가 있기 때문에 조선인들을 나무가 많은 산간 지방에 데리고 가서 목탄을 만들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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