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

"침묵하지 말자!"소리내어 전하자.

2. 유년시대

저는 1928년 8월 15일에 히키미[匹見]에서 태어났습니다. 출생 신고를 본적지인 합천에 제출해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고향에 계신 큰아버님께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아이가 태어나도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큰아버지께서는 아이가 제대로 크는 것을 보고 출생 신고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셨는지 1년간 출생신고를 미루어 두셨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제 호적에는 생년월일이 1929년 8월 15일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1935년, 우리 가족은 히로시마현[広島県] 사이키군[佐伯郡] 요시와무라[吉和村](현재는 하쓰카이치시[廿日市市] 요시와[吉和]로 변경됨.)로 이사했습니다. 시마네현에서 히로시마현으로 왔지만, 히로시마현 요시와와 시마네현 히키미는 서로 현 경계선을 사이에

둔 마을로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요시와에서도 목탄 만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폐품 회수나 결핵으로 죽은 사람들의 유해, 유품 처리 등 일본 사람들이 꺼리는 일들을 하셨습니다. 그 당시, 결핵은 치료 약이 없었기 때문에 죽는 사람이 많았고, 그래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병이었습니다.

이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집 근처에 있는 요시와무라소학교[吉和村小学校](*[1]) 분교에 입학했습니다. 소학교 분교에 다닐 때는 조선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차별받은 일도 없이 즐겁게 학교에 다니던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4학년이 되자 4km 떨어진 본교로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다른 아이들로부터 “조선인!”이라며 차별당했습니다. 그전까지는 들어 본 적도 없었습니다.

요시와무라는 전부 400세대 정도가 사는 그리 크지 않은 마을로 누가 어디에 사는지 모두 알고 지내는 마을이었습니다. 조선에서 온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아마도 4세대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우리에게 “조선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마도 집에서 어른들이 조선인에 대해 차별하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차별이란 것을 알고 태어나지는 않으니까요. 부모들이 집에서 하는 말들을 보고 듣고 하면서 배웠겠지요.

4~5학년 때의 일입니다. 담임 선생님이었던 스기노하라[椙原] 선생님은 노골적으로 저를 타깃 삼아 차별했습니다. 반에서 누가 울고 있으면 반드시 제가 한 짓일 거라며 저를 구타하고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리고, 복도에 세우는 등의 벌을 주기도 했습니다.

겨울에 눈이 와서 쌓이는 날엔 점심을 뜨뜻하게 먹고 싶은 마음에 모두가 스토브 주위에 도시락을 놓아두었습니다. 그런데 도시락이 데워지면서 도시락 안에 김치 냄새가 나면 담임 선생님이 제 도시락을 창으로 던져 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저는 쌓인 눈 위에 널브러진 밥과 반찬을 주워 담아 먹었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했다고 거짓된 고자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동급생 중에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본교에서는 저 외에도 조선인 학생이 3명 더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부모 중 어느 한쪽이 일본인이었습니다. 나머지 두 명과는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6학년 때 일입니다. 방과 후에 집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나카쓰타니[中津谷]라는 마을의 다리 입구에 위치한 잡화점 안에서 아저씨가 갑자기 나오더니 저에게 “야! 조선 놈. 너 이리 와 봐.”라고 불렀습니다. 제가 아저씨한테로 갔더니 아저씨가 “거기 서!”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저씨는 갑자기 제 다리에 소변을 보았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도망도 못 가고 그저 고개를 떨군 채 눈물만 흘러나왔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뜨뜻미지근한 소변 감각이 잊히질 않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우리 아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라고 따지러 가셨을 아버지가 그저 입을 다문 채 듣고만 계셨습니다. 그 후, 저는 어떤 말을 듣거나 무슨 짓을 당하더라도 그저 울면서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그저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조선 사람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조국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집에서는 우리말을 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일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말씀이 너무 싫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습니다. 동네 자치회인 초나이카이(町内会)에서도 치마저고리를 입지 말라고 말했지만, 어머니께서는 그런 말을 들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치마저고리만 입고 계셨습니다.

1939년에 일본 정부는 조선과 일본 국내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에게 다음 해인 2월 11일부터 8월 11일까지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라는 지령을 내렸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어디에서 들었는지 경상남도가 출신인 사람들은 ‘에[江], 경상북도가 출신인 사람들은 ‘야마[山]’를 붙이도록 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와서 우리 가족의 성을 ‘에가와[江川]’로 정했습니다. 그때까지 우리 가족은  ‘우라나카[浦中]’라는 성을 쓰고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에게 잘해 주신 ‘미우라[三浦]’라는 사람이 자기 이름 중 한 자를 따서 이름을 지으라고 했다고 들었습니다. 본래 제 이름은 ‘마사이치[正一]’였는데, 나중에 제가 음은 같이도 한자를 ‘政市’로 바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가족은 저를 ‘마-짱’이라고 불렀습니다.

소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아버지가 하시는 목탄 만드는 일을 도왔습니다. 한 가마가 15kg이나 되는 목탄 가마를 등에 지고 산 밑에 차가 다니는 도로까지 급경사 산길을 걸어서 내려갔습니다. 상당히 무거웠습니다.

1941년 제가 6학년 때, 아버지께서는 대정익찬회(*[2])로부터 히로시마현[広島県] 아키군[安芸郡] 사카마치[坂町]에서 미쓰비시조선 독항을 만드는데 인부 모집하는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하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 가족은 사카마치에 가서 인부들에게 숙식 제공하는 ‘함바’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규모 공사가 있을 경우에 노동자들이 숙소로 쓰기 위해서 가설로 지은 큰 건물에서 함바를 하면서 우리 가족도 조선에서 징용 온 약 20명의 젊은 사람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곳에서 “오늘은 아무개는 아무 현장으로 가 주시게.”라고 노동자들에게 작업을 분담시키는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사카마치에 위치한 요코하마진조소학교고등과[横浜尋常小学校高等科](*[3])에 입학했습니다. 그곳에서 조선인은 저 혼자뿐이었습니다만, 차별당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1]) 소학교[小学校]는 초등학교를 말합니다.

(*[2])  대정익찬회[大政翼賛会]는 1940년 10월 12일부터 1945년 6월 13일까지 존재하였던 일본 제국의 관제 국민통합 단일기구입니다. 독일 나치의 원리를 받아 들인 일본적 파시즘을 구축하려 했습니다.

(*[3])‘진조소학교[横浜尋常小学校]’라는 것은 일반 소학교(초등학교)를 말하며, 소학교 뒤에 붙은 ‘고등과[高等科]’는 소학교에 병설된 2년제로 소학교 6학년을 졸업한 후에 진학하는 일종의 중등과(중학교) 과정입니다.

진조소학교에 진조소학교고등과 2년제가 병설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그 위 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이 별로 없었습니다. 소학교를 졸업한 학생 대부분은 취직하거나 군 입대를 지원했습니다. 제가 소학교 6학년 때, 친척 아저씨께서 저를 히로시마역에 데리고 가 주셨는데 그때 본 증기기관차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저는 고등과를 졸업하고 국철 기관고에 입사 원서를 넣어서 입사 시험을 치렀습니다. 당시 국철은 국가 기관으로 합격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었습니다. 더욱이 저는 일본인이 아닙니다. 그런 제가 합격했습니다. 채용 통지가 학교에 보내지고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합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너무 기뻤습니다. 얼마 후, 교장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이것을 가지고 내일 기관고에 가거라.”라고 말씀하시며 봉투 하나를 건네주셨습니다.

봉투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저는 봉투 안에 뭐라 쓰여 있는지 너무도 궁금했습니다. 저는 부엌에 들어가서 봉투를 봉한 접착 부분을 밥하는 가마솥에서 새어 나오는 김에 쏘인 후, 봉투를 조슴스레이 뜯어서 봉투 안에 들어 있는 서류를 꺼내 보았습니다. 서류의 비고란에 ‘조선인’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시점에 어째서 이런 것을 쓰는 것일까? 왜? 내가 조선인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채용하지 않을지도…”. 그렇게 생각한 저는 먹물로 쓴 그 세 글자를 지우개로 서류가 뜯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정성을 다해 지웠습니다. 공문서를 위조한다는 것은 법률 위반이고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만, 그때는 그러한 것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1943년 14살 때, 저는 무사히 국철에 취직해서 희망했던 대로 히로시마역 근처에 있는 제1기관고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마쓰다스타디움이 있는 곳입니다. 제가 하는 일은 기관고에 들어 온 기관차를 청소하고 석탄과 물을 보급하는 일이었습니다. 기관차는 석탄을 연료로 달리기 때문에 어느 정도 달리면 기관고에 들어가 석탄과 물을 보급해 줘야 합니다. 석탄과 물을 보급하고 청소하는 것이 신입이 해야 할 일들이었습니다. 당시는 물자가 부족하여 청소할 때 쓸 걸레가 없었기 때문에 짚을 묶어서 그을린 부분을 긁어서 닦아 냈습니다.

입사 초기에는 기숙사에 들어가서 생활했습니다. 그곳에서는 군에 들어온 초년병들과 같이 생활해야 했었습니다. 선배 사원이 한밤중에 자는 신입사원을 두들겨 깨워서 복도에 줄 세워 놓고 “안경 벗어!”, “입 꽉 다물어!”라고 말하며 구타하기 일쑤였습니다. “근성을 키우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같이 들어간 동기 중에는 선배들이 너무 엄해서 그만둔 사람도 몇 사람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하는 일을 좋아했기 때문에 일을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선배들의 폭력은 기숙사를 나올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식사였습니다. 기숙사에 들어가서 1~2개월은 만주에서 보내온 수수를 쌀에 섞은 밥이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수수도 넣지 않고 콩 찌꺼기를 섞은 밥을 주었습니다. 콩 찌꺼기는 콩에서 기름을 짜내고 남은 것으로 지금은 동물 사료로 쓰이고 있습니다. 도무지 입어 넣을 수 없는 음식들이었습니다. 저는 물에 밥을 헹궈서 콩 찌꺼기를 흘려 버리고 밥알만 먹었습니다. 절반을 흘려 버리기 때문에 한참 먹어야 할 나이였던 저에게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항상 배고픈 상태였습니다. 그러한 생활을 2년 정도 했는데 너무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 시기에 우리 가족은 하쓰카이치시[廿日市市] 헤라[平良]로 이사했는데 그때부터 저는 집에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사카마치[坂町]에서 하던 일이 끝나고 하쓰카이치에서도 함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함바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는 먹을 것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하쓰카이치에서 근무처인 히로시마역까지는 갈아타지 않고 국철로 한 번에 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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