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

"침묵하지 말자!"소리내어 전하자.

3.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

그날 아침, 저는 왠지 모르게 하얀 바지를 입고 가고 싶어서 어머니에게 하얀 바지를 꺼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만, 어머니가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철도원에게는 모자와 위아래 검은 제복을 나눠주고 출근할 때 착용하라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어머니하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항상 타고 다니던 기차를 놓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시내 가까이 국철 선로와 평행해서 달리는 전차를 타고 출근했습니다. 그 당시, 히로시마전철[広島電鉄]에서 운행하는 전차 노선은 미야지마선[宮島線]과 시내선 선로가 이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히로시마역까지 가려면 미야지마선을 타고 고이 [己斐] 역에서 내려서 시내선으로 갈아타야 했습니다.

그날, 전차 안에서 동기인 기타니[木谷] 군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제 일터는 제2기관고였기 때문에 저는 마토바초[的場町] 전차 역에서 내렸습니다. 기타니 군은 일터가 제1기관고라서 다음 역인 엔코바시[猿猴橋] 전차 역에서 내릴 거라고 말했습니다. 전차 역 하나 차이가 우리의 생사를 갈라놓았습니다. 기타니 군은 전차 안에서 원폭피해를 입고 죽었다고 나중에 들었습니다.

제가 원자 폭탄이 터진 폭심지 근처를 통과한 것은 8시 5분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10분 정도 늦게 전차를 탔더라면 저도 원자 폭탄을 직격으로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제가 전차에서 내려서 아라카미바시[荒神橋] (폭심지로부터 1.8km) 다리를 건너자마자  갑자기 오렌지빛에 노란색을 섞어 놓은 듯한 빛이 주위를 덮쳤습니다. 히로시마에서는 원자 폭탄이 떨어졌을 당시를 표현하는 말로 ‘피카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원자 폭탄이 터질 때 빛이 갑자기 ‘번쩍’했다는 의미인 일본 말 ‘피카’라는 말에서 따 온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갑자기 ‘번쩍’ 빛을 발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빛의 섬광이 띠 모양으로 펄럭이면서 주위를 떠다니는 듯했습니다. 그것도 한순간에 없어지는 빛이 아니라 2~3초 정도 떠다니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눈앞에 있던 집들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두려운 마음에 가지고 있던 도시락통을 내려놓고 평소에 훈련받던 대로 엄지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눈과 코를 막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다리를 거의 다 건너서 기둥이 있는 부근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귀를 너무 세게 막았었나 봅니다. 다른 사람들은 원자 폭탄이 떨어졌을 때 ‘꽝’하는 소리가 났다고 하는데 저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5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주위를 둘러보려고 몇 번인가 눈을 떠 보았습니다. 그런데 앞이 새카맣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옅은 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섬광  그림:소네 사야카(曽根 沙也佳)

주위는 정적에 둘러싸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뒤집어쓰고 있던 모자와 안경, 그리고 밑에 내려놓았던 도시락통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어나서 둘레를 찾아보았습니다. 20~30m 앞에 있는 무너져 내려앉은 집 나뭇더미 사이에, 눈에 익은 보자기가 보여 도시락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자와 안경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섬광을 보고 엎드린 모습 그림:구라시게 유키[倉重 侑季]

 딱 한 번 섬광이 지나갔을 뿐인데 주위를 둘러보니 집이 모두 무너져 내려앉아 있고, 전에는 보이지 않던 히로시마역 뒤쪽에 위치한 오나가초[尾長町]라는 동네가 훤히 보였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볼 새도 없이 저는 너무 무서워서 피난할만한 곳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때 다리 옆에 계단이 보였습니다. 문득 다리 밑으로 피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계단 밑에는 네다섯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이것은 신형 폭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일본 다른 도시에서 폭탄이 떨어지는 공습을 겪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분은 도시를 파괴하고 화재를 일으키기 위해 떨어뜨리는 소이탄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또 저를 보고 “얼굴이 붓고 새빨갛게 되었구나! 화상을 입었나 보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의 말을 듣고 저는 손으로 볼을 만져보았습니다. 너무 아팠습니다. 그분이 말해 주기 전까지 저는 아프다는 것을 못 느끼고 있었습니다.

9시경에 저는 그곳에서 나와서 일터로 향했습니다. 도로 양쪽에 있던 집들은 벌써 타서 숯 더미가 되어 있었고 숯 더미가 되어 버린 집들 사이 사이에서 “살려 주세요!’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숯 더미 위에서 “안에 가족이 있어요. 살려 주세요!”라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저는 너무 무서워서 그저 그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달렸습니다. 누구 한 사람 도와주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앞에 짐수레를 단 소가 질주해 오다니 반대쪽으로 사라졌습니다. 소를 모는 사람도 없이 소만 달리고 있었습니다.

원자 폭탄이 떨어진 후에 일어나서 본 첫 풍경(아라카미바시[荒神橋] 다리에서 보는 붕괴된 집들). 그림:도모타 마이[富田 真衣]

제 직장인 기관고는 산요본선[山陽本線] 철로에서 건널목 건너편에 있었습니다. 저는 건널목을 건너기 전에 잠깐 울타리 쪽을 쳐다봤습니다. 남자 한 사람이 울타리에 기댄 채 죽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 몸에 상처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처음 본 시체였습니다.

 제가 기관고에 도착하자마자, 동기 중 4명이 다가와 “살아 있었구나!” “얼굴이 빨갛다!”라고 말을 걸어왔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저를 걱정해 주면서 내 주위로 모였습니다. 기관고는 콘크리트로 만든 건물이고 크고 개방되어 있어서인지 폭풍도 무사히 지나갔었나 봅니다.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무사했습니다.

화상 입은 상처에는 기름을 발라주는 것이 좋다며 동료들이 기관고 운전대 밑에 있는 엔진 오일을 가지고 와서 저에게 발라주었습니다. 기관차에서 사용하던 엔진 오일을 꺼내왔기 때문에 오일 색은 새까맸습니다. 동료들은 그 오일을 제 얼굴이나 손발, 목 등 몸 여기저기 화상 입은 곳에 발라 주었습니다만, 저는 너무 아파서 “제발 그만 좀 발라!’라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방사선으로 화상입은 저에게 기관고 오일을 발라 주는 동료들. 그림:도모타 마이[富田 真衣]

오일을 바른 후, 저는 기관고 안에서 누워서 쉬고 있었습니다. 점심이 되어 도시락을 먹으려고 했습니다만, 식욕이 나지 않아서 반도 못 먹었습니다. 그 도시락도 방사능에 오염되어 있었겠지만, 당시는 그런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 후 한참이 지나서, 잃어버린 모자를 대신할 다른 모자라도 찾아 놔야겠다는 생각에 국철 관련 시설이 많은 동연병장으로 갔습니다. 제가 그곳에 간 것은 오후 2시경으로 그 기분 나쁜 이상한 섬광이 지나가고 5시간이 지나서였습니다. 가는 도중에도 연병장에 가서도 온몸이 타서 처참한 몰골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알몸과 별다르지 않았습니다. 한여름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얇은 옷으로 가볍게 입고 있었습니다. 폭탄이 폭발할 때 분 폭풍으로 사람들이 입고 있던 옷이 모두 날아가 버렸던 것입니다. 사람들 팔은 피부가 벗겨져 손가락 밑으로 피부가 녹아내려 늘어져 있었습니다. “물 좀 주세요!” “살려 주세요!”라고 울부짖으며 줄줄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위아래 제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노출된 얼굴과 목 부분에만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그 사람들을 보고 너무도 놀라서 어떻게 된 건지 도대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모자 찾기를 그만두고 기관고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할 일도 없고 이런저런 생각이 들던 중에 갑자기 부모님과 동생들 걱정이 들었습니다. 제 밑으로 여동생 한 명과 남동생이 여섯 명 있었습니다. 한순간 섬광이 지나치기만 했는데도 이 정도 피해를 보았다는 것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 집이 있는 하쓰카이치 쪽은 어찌 되었을까? 히로시마시 남구에 위치한 육군피복지창(폭심지로부터 2.7km)에서 일하고 있는 누나는 괜찮을까? 누나는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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