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

"침묵하지 말자!"소리내어 전하자.

4. 귀가

4시경에 우리 집과 같은 방향인 서쪽에 사는 동료 세 명과 함께 기관고를 나왔습니다. 히로시마역은 불에 타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건넌 아라카미바시 다리 부근도 불에 타서 건너갈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회해서 다이쇼바시[大正橋] 다리를 지나 엔코가와[猿候川] 강을 건너서 남쪽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쓰루미바시[鶴見橋] 다리를 지나 교바시가와[京橋川] 강을 건넜습니다. 히로시마분리대학[広島文理大学] (현재는 히가시센다마치[東千田町] 공원이 됨) 앞에까지 갔을 때였습니다. 대학 외벽이 무너져 내리면서 그 밑에 깔려 죽은 말 사체가 보였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말의 눈알이 튀어져 나와 있었습니다.

원폭 피해를 입고 쓰러져 죽은 말  그림:가쓰라기 신사쿠[桂木 晋作]

거기서부터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건너갈 수 있는 다리를 찾아 다녔습니다. 모토야스가와[元安川] 강, 혼카와[本川] 강, 덴마가와[天満川] 강, 후쿠시마가와[福島川] 강, 야마테가와[山手川] 강을 건넜습니다. 결국엔 히로시마에 있는 7개 강 모두를 건너게 된 것입니다. 시내 중심지는 곳곳에 불이 나서 지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하며 걸어갈 수 있는 곳을 찾아 다니며 서쪽을 향해 갔던 것입니다.

다리가 있는 곳에는 원폭피해를 본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리를 건너가는 우리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가족이나 친척이 자신들을 찾으러 와 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 좀 주세요!” “물 좀 주세요!”라며 힘없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보고도 못 본 채 듣고도 못 들은 채 입 다물고 건너갈 뿐이었습니다.

저는 동연병장에 갔을 때도 처참한 모습의 원폭피해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랬는데도  그 다리 부근에서 지나가는 우리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응시하는 그 사람들을 봤을 때, 뭐라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렵지만, ‘아! 여기가 바로 지옥이구나!’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건넌 모든 강에는 많은 시체가 둥둥 떠 있었습니다. 불을 피해서 강에 뛰어든 사람, 물 마시기 위해 강에 들어간 사람, 그들 모두가 강물에 빠져서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리 밑에 앉아 있는 원폭피해자들이 다리를 건너가는 우리들을 응시하는 모습.
그림:구라시게 유키[倉重 侑季]

같이 걸어갔던 동료와는 고이[己斐], 다카스[高須]에서 헤어졌습니다. 혼자가 된 저는 하쓰카이치[廿日市]로 향하는 미야지마카이도[宮島街道] 도로를 걸어갔습니다. 서쪽으로 향하는 간선도로라서 그런지 죽은 사람 유해를 산더미처럼 싣고 가는 트럭이 많이 지나갔습니다. 손을 들어 “태워 주세요!”라고 부탁해도 운전수 들은 들은 척도 않고 그냥 지나쳐 가버렸습니다. 이노쿠치[井口] 부근에 도착했을 때, 한 아저씨가 “이 원수는 꼭 갚고 말겠다!”라며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원수를 대체 어떻게 갚겠다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며 계속 걸어갔습니다. 이쓰카이치[五日市]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주위가 캄캄해졌습니다.

간신히 집에 도착한 것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밤 10시 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후 4시경에 기관고를 출발해서 6시간 정도 걸어서야 집에 도착한 것입니다. 집까지의 거리는 대략 16km입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부모님은 안 보이시고 집에는 여동생과 남동생 둘만 있었습니다. 동생들에게 부모님은 어디 가셨냐고 물어보았더니, 시내에 큰일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를 찾으러 나가셨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도 부모님께 국철 어느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드린 적이 없었습니다. 만일 부모님께서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저를 보러 오시기라도 하면 부모님이 말씀하시는 어투에서 조선인이라는 것이 금방 들통나기 때문에 알려드리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자식이 어디에서 일하는지도 모른 채 무조건 찾아 나선 부모님의 사랑이 정말 고마웠습니다.

11시경에 어머니께서 집에 돌아오셨습니다. 신고 있던 짚신은 너덜너덜해져서 거의 맨발에 가까운 상태였습니다. 이쓰카이치 근처까지 갔지만 시내 쪽에서 줄줄이 걸어오는 피해자들의 모습을 보고, ‘우리 아들도 살아 있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는 저를 보고, “살아 있었구나!”라고 말씀하시고는 기관고에서 발라 준 기름으로 새까맣게 된 저를 부둥켜안고 “아이고! 아이고!’ 하며 제 얼굴을 비비고 우셨습니다. 그때, 어머니 얼굴이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이고!”라는 것은 조선 사람들이 희로애락을 표현할 때 쓰는 추임새 말입니다. 그리고 헌 헝겊과 두들겨서 부드럽게 만든 짚으로 제 몸에 붙은 그름을 닦아 주셨습니다. 피부가 벗겨져서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히로시마역 근처까지 가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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