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

"침묵하지 말자!"소리내어 전하자.

6. 조국의 분단이 일본에 사는 우리 동포들에게 가져다 준 비극

제가 30세 되었을 때, 선을 보고 결혼했습니다. 제 아내의 친정집은 미나미쿠[南区] 히지먀마혼마치[比治山本町] 에 ‘히치후쿠가구’라는 중고 가구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옆에 살고 있던 도요하라[豊原]라는 사람에게 중매를 부탁했습니다. 도요하라 씨는 조선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간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결혼식에서 신랑·신부 뒤에 걸려 있는 현수막에 한문으로 ‘축 결혼식 이종근・조기자’라고 쓰여 있어서 그때까지 본명을 써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일본이 강제로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게 하기 전에도 ‘우라나카[浦中]’라는 성을 쓰고 있었고, ‘에가와 마시이치[江川政市]’로  개명한 후에는 본명을 사용할 일도 본명을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중매해 준 사람은 우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이 많고 조국의 이름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북한계의 조선총련에도 남한계의 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에도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그 어느 쪽에도 소속되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까지는 조국의 분단이 일본에 사는 조선인들을 분단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일본으로 건너왔을 때는 모두 같은 조국에서 왔으니까요. 어려우면 서로 도와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때까지 조국을 떠나 서로 도와 가며 살아오던 사람들이 갑자기 적대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저를 불러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총련계 학습회에 참가해 본 적은 있습니다. 일본 강점기에 조선 반도에서 일어난 일이나 일본에 사는 조선 반도 출신자들이 처한 상황 등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때까지 몰랐던 것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 무렵, 총련도 민단도 서로 자국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정치사상만을 내세우는 등 서로가 반목질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양쪽 다 관심이 없었습니다. 북한은 자국에 대해 늘 ‘지상의 낙원’이라 선전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편도 티켓이라는 것도 모른 채 조선 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많은 사람이 니가타[新潟]항에서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으로 건너갔습니다.

제가 농담 반으로 아버지에게 북한에 가자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우리 조국은 남쪽이라며 화를 내셨습니다. 제 친구는 부모님 고향이 남쪽인데도 북쪽 선전에 속아 북한에 건너갔습니다. 저는 니가타까지 친구를 배웅하러 갔습니다. 그 친구가 북한에서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면 저도 아마 그 친구 뒤를 따라 북한으로 갔을지도 모릅니다. 친구는 북한에 가서 자리 잡으면 연락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갔으나, 단 한 번의 연락도 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38~39세 되던 해, 저는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운영하시던 중고 가구에서 일을 배워서 폐점하거나 도산하는 가게, 회사에서 주방 기구, 점포용 가구, 사무용기기, 가구 등을 매입해서 판매하는 가게를 개점할 생각으로, 고물상 면허를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히로시마시 나카쿠 후나이리[舟入]에서 ‘아히루야[あひる屋]’라는 고물상을 개업했습니다. 그 가게는 그러한 업종의 가게로서는 히로시마에서 제1호였습니다. 저는 60세 때, 사장직을 내려놓고 은퇴했습니다.

40세 때, 어머니를 데리고 부모님 고향인 한국 북천면에 가려고 여권을 신청하기 위해 시모노세키[下関]에 있는 한국영사관에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조선은행[朝鮮銀行](*[1])에서 돈을 빌려서 그런지 아니면 총련 관계자들과 가까이 지내서인지 모르겠으나, 일반적으로 발급해 주는 여권이 아닌 1회 도항만 가능한 여권을 발급해 주었습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한국에 갔습니다만 그때마다 매번 여권을 새로 신청해야만 했습니다.

어머니와 후쿠오카 공항에서 비행기로 부산에 갔습니다. 어머니한테는 그리운 고향이었으나 저로서는 처음 가보는 고국이라 감격의 눈물이 나왔습니다. 공항에 친척분들도 마중 나와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만 공항 밖으로 내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KCIA의 조사를 받고 “북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금까지 북한의 원조를 받은 적이 있는가?” “총련과 관계되는 일을 한 적은 있는가?” 등 약 2시간 동안 심문을 받았습니다. 간신히 내보내 주기는 했습니다만, 제가 한국에 체재하고 있는 동안 계속해서 KCIA가 저를 미행했습니다. 부산신문에는 “히로시마현 조선인 상공회 회장 일본에서 오다!”라는 제목으로 저에 관한 기사가 크게 실렸습니다. ‘히로시마현 조선인 상공회’는 총련계 단체로 제가 일본에서 영업 업무상 회원이기는 하나, 회장은 아니었습니다.

(*[1]) 조총련 쪽에서 운영하고 있는 은행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