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

"침묵하지 말자!"소리내어 전하자.

7. 피스포트를 타고 세계를 다니며 증언하다.

2011년, 구독 중인 주고쿠신문[中国新聞]에 ‘세계 일주 여행, 원폭피해자는 무료 승선’이라는 피스포트를 광고하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무료로 세계 일주 여행을 할 수 있다니 나쁘지 않네!’라는 정도의 가벼운 마음으로 응모했습니다. 그 후, 피스포트 대표인 가와사키 데쓰[川崎哲] 씨로부터 연락을 받고 면접 보기 위해 만났습니다. 면접 중에 제가 원폭피해를 입은 당시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면접 후 한참 지나서 제가 선정되었다는 통지가 왔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누군가에게 원폭피해 증언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설마 제가 선정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었습니다.

제가 탄 피스포트는 2012년 1월 24일 요코하마[横浜] 항에서 출항했습니다. 히로시마에서 원폭피해자 5명과 나가사키 원폭피해자 5명, 일반 승객 약 1,000명, 그리고 승원들을 태운 피스포트를 타고 100일 이상의 크루즈 여행을 떠났습니다. 주최자로부터 출항할 때 인사말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배는 타히티, 페루, 파나마, 쿠바, 세네갈,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인도, 싱가포르 등의 항구에 정박해 가면서 동쪽으로 지구를 일주했습니다. 피스포트가 들른 지역은 21개국 2개 도시인데, 저는12개 항에서 증언을 했습니다. 16세에 원폭피해를 입고 84세 때 처음으로 원폭피해 증언을 했던 것입니다.

원폭피해자는 배 안에서 그리고 배가 정박한 항구에서 개최되는 이벤트에서 매번 한 사람씩 원폭증언을 했습니다. 증언 담당이 아닌 원폭피해자도 같이 증언을 들었습니다. 관광할 시간은 거의 없었습니다. 다른 원폭피해자 모두가 원폭피해 후에 화상 입은 상처에 구더기가 득실거렸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저는 상당히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때까지 몸에 구더기가 피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창피해서 원폭피해 증언을 부탁받아도 계속 거절해 왔었기 때문입니다. 나만 몸에 구더기가 피었을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그 후부터는 원폭피해 증언을 할 때, 구더기가 피었다는 내용도 넣어서 증언했습니다.

쿠바에서는 피델 카스트로 전 의장님과 면담했습니다. 원폭피해 체험을 이야기했더니 꼭 스페인어로 책을 출판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아주 상냥한 분이셨습니다. 또 쿠바 시내에서 미국 자동차 포드나 GM 등의 클래식한 자동차가 달리고 있는 것에도 놀라웠습니다.

2012년, 쿠바 카스트로 전 의장님과 함께.

아프리카 동부에 위치한 세네갈에서는 예전에 노예무역의 거점이 되었던 수도 다카르 근해에 있는 고래섬을 방문했습니다. 그저 일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던 젊은이들이 갑자기 납치되어 그곳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노예로 끌려갔던 것입니다. 그 수는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약 400년간에 걸쳐서 약 1,50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1978년에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그 당시에 끌려 온 흑인들이 수용되었던 시설이 현재는 ‘노예의 집’이라는 박물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노예들한테 행한 비인도적 행위를 둘러보다가  갑자기 일본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의 처지가 떠올랐습니다. 박물관 관장님께서 “비인도적이라는 점에서는 원폭피해자와 노예가 된 흑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박물관 정면 아니면 남녀 동상 옆에 원폭피해자 동상을 세우는 것은 어떨는지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에도 우리는 스페인, 프랑스, 그리스 등 많은 곳에 정박하면서 원폭피해 체험을 교대로 증언했습니다. 증언 횟수가 거듭될수록 내용을 덧붙이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면서 원폭 증언하는 것에 조금씩 익숙해졌습니다.

한 사람이 원폭 증언을 할 때, 배에 탄 다른 원폭피해자 모두가 증언을 경청하고, 다음 날 미팅에서 서로의 감상을 얘기했습니다. 저는 당시의 원폭피해 체험만 증언했습니다만, 지도 강사 중 한 사람으로 짧은 구간만 승선하신 한국원폭피해자 곽기훈 씨로부터 “얘기가 너무 깁니다. 조선인으로 어떠한 차별을 받았는지 그 점을 강조하시면 좋을 듯합니다.”라는 조언받았습니다.

곽기훈 씨의 조언을 받고 저는 그리스에서 증언할 때 제 원폭 체험 증언에 조선인으로서 차별받은 내용도 덧붙였습니다. 그랬더니 다음 날 미팅에서 일본인 원폭피해자 중에 두 사람이 강한 어조로 “일본에 대해 나쁘게 이야기하는 것은 하지 마세요.”라고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저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만 이야기했을 뿐인데, 두 사람이 왜 화를 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 두 사람은 제가 차별받은 이야기를 그만두게 하지 않으면 배에서 내리겠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대표인 가와사키 씨가 “이종근 씨가 말씀하신 것은 거짓이 아닙니다.”라고 제 편을 들어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분노의 화살을 가와사티 씨한테 향해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배에서 내리지는 않았으나, 서로 불편한 관계가 풀리어지지 않은 채 저와 대화를 전혀 나누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저를 포함한 원폭피해자 7명과 가와사키 대표는 이집트에서 비행기를 타고 우크라이나 오데사로 갔습니다. 역사상 최악의 원자폭탄 사고를 일으킨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바로 옆에까지 가기도 하고, 사고로 유령의 도시가 되어 버린 지역도 견학했습니다. 벨라루스 공화국에서는 의료 종사자들과 주민, 폐쇄 작업을 하는 사람들과 여러 의견을 나눴습니다. 방사성 폐기물을 봉쇄할 석관 건설 작업을 하는 사람이 “영원히 방사능을 봉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근린 주민 사람들로부터는 원폭 건강 피해와 보상에 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귀국 후, 한국 원폭피해자와 북한의 원폭피해자를 위해 여러 활동을 하고 계시는 도요나가 게사브로[豊永恵三郎] 씨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 원폭피해자로서 증언한 적이 없다는 저에 관한 기사를 신문을 보고 알게 되었다며 학생들에게 증언해 주지 않겠느냐며 부탁하셨습니다. 제가 머뭇거리며 바로 대답을 못 하자, 피스포트에서의 경험담이라도 괜찮다며 간곡히 부탁하셔서 저는 히로시마에서 처음으로 원폭 증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8월의 어느 무더운 날, 저는 평화공원 나무 그늘 밑에서 증언했습니다. 그때의 인연으로 저는 평화기념자료관 증언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도선사의 한 사람으로 피스포트에 승선하고 있었던 미국 핵무기 반대 단체와 피폭자・스토리지 대표 캐서린・사리반 씨로부터 뉴욕에 와서 증언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다음 해인 2013년, 저는 뉴욕에 초청받아 몇 군데 학교를 돌아다니며 원폭피해 체험을 증언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또 원폭 투하를 지시한 트르먼 대통령의 손자인 클리프턴 트르먼 대니엘 씨하고도 만났습니다. 저팬소사이어티에서도 증언했습니다.

다음 해, 저는 또 피스포트에 응모해서 세계를 다니며 증언했습니다. 선박은 지난 해와는 반대로 서쪽을 향해 세계를 일주했습니다. 이때 같이 승선한 원폭피해자는 히로시마에서 6명, 나가사키에서 2명이었습니다. 싱가포르, 스리랑카, 요르단, 몬테네그로, 스페인, 베네수엘라, 페루, 칠레, 하와이 등 18개국 10개 도시를 돌아다녔습니다. 증언은 12개국, 14개 도시에서 했습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대통령과도 면담했습니다. 그때 대통령께서는 “인류는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와 같은 원폭 피해의 비극을 또다시 불러일으켜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의 대통령과의 면담을 많은 매스컴에서 중계하고 중남미 모든 지역에서 방영했습니다. 또, 아랍권 주요 위성방송국인 알자지라에서 취재하러 와서 아랍제국에서도 방영되었다고 합니다.

2014.7, 베네수엘라 대통령 방문

프랑스나 스페인을 방문했을 때는 반핵 단체와 환경보호 단체와도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선물로 준 티셔츠에는 일본어로 “침묵하지 말자!”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저는 이 문구가 아주 맘에 들어서 지금도 가끔 이 티셔츠를 입습니다.

특별 프로그램으로 10명 정도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일본인 가이드 나카타니[中谷] 씨가 안내해 주셨습니다. 전시실 케이스 안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여성의 모발과 어린아이들의 구두, 안경 등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살해하기 전에 샤워시킨 샤워실, 살해한 가스실 등을 둘러보았습니다.

각지에서 보내온 유대인과 정치범들이 수용소에 도착하면 먼저 노동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나눴다고 합니다. 쓸모없다고 판단된 약 70~75%의 사람들은 샤워실로 직행했습니다. 여성은 전신을 면도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살해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샤워실에서 조금 떨어진 가스실까지 어떤 마음으로 끌려갔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습니다.

저는 아라카미바시 다리 끝자락에서 원자폭탄 방사선에 온몸을 쐬었습니다. 그래도 그때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샤워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쓸모 있다고 판단되어 살아남은 사람들도 아주 열악한 취급을 받으며 가혹한 노동으로 약 90%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약한 사람이나 다친 사람, 병에 걸린 사람들은 가스실로 끌려갔습니다. 인간으로서 어찌 그리도 잔혹한 짓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었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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