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
히로시마에서 저는 오나가쵸(폭심지, 즉 폭발의 중심으로부터 2.5킬로메터 지점, 현재의 히가시구 야마네쵸)라는 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 집이 오나가국민학교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1942년, 6살 어린 남동생 히로유키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돌이 막 되었을 무렵, 병에 걸린 저희 아버님께서 41세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님은 나름 재산을 남겨주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 집안은 아버님이 돌아가셨음에도 비교적 여유로운 삶을 지내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치원으로 다닌다는 것은 당시로서 흔한 일이 아니었으나, 저는 히로시마 여학원 유치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는 집 근처의 오나가 국민학교가 아니라, 다니던 유치원에서 가까운 노보리쵸 국민학교에 지역을 넘어서 입학했습니다. 많은 유치원 친구들이 그 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1학년 혹은 2학년 무렵, 집 근처 학교로 옮겨 다니라는 학교 당국의 지시를 받아 전학하게 되었는데, 친구 하나 없어서 외로웠습니다. 공습이 있을 때 위험하니까 집에서 가까운 학교에 가라는 뜻이었을 겁니다.



저는 1936년 3월 29일 아버님인 타이치와 어머님인 쓰야코의 첫아들으로 요코하마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 모두 히로시마 사람이었는데, 아버님은 경찰관이며 제가 태어난 무렵에는 규죠(황궁)의 경호 임무을 맡아 계시던 관계로, 요코하마에 살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해 발생한 2・26 사건 탓에, 어머님이 저를 낳아셨던 그 날조차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어머님은 혼자 아이를 낳아셨다 합니다. 제가 3살 때 아버님이 갑자기 히로시마로 돌아가겠다고 말씀하셔서, 저희는 히로시마로 돌아왔습니다. 요코하마는 제 기억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1945년 전황이 악화하여 국내 도시의 상당 부분이 공습을 받게 되자, 도시부에 살던 3학년이상의 학생들은 소개(안전한 원격지로 피난)하여 시골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시골에 사는 친척 등 있는 아이는 친척집으로(‘연고소개’라고 함), 없는 아이는 선생님과 함께 지방의 사찰 등으로 머물게 되었습니다(‘집단소개’라고 함). 막 국민학교 3학년이 된 저는 연고소개를 위하여 조부모님이 계시는 히로시마현 아키군 후추쵸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학한 후추국민학교에도 친구가 없고 친척집 근처에도 함께 놀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섭섭해서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는 매일 오나가쵸에서 후추쵸까지 어린이의 걸음으로 1시간 정도 걸어서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 봤자 친구들은 모두 소개한 상황이다 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학교에는1,2학년 아이들만 남겨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집에서 가까운 히가시 연병장에서 혼자서 죽방울을 하거나 고무공을 벽에 던지거나 하면서 놀았습니다. 죽방울놀이를 할 때 “♫ 이 히로시마에서 유행하는 일월공은 재미있다, 도우레쓰공도 재미있다”라며 노래를 불렀던 것을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죽방울은 히로시마에 유래하는 장난감으로 알리고 있었는데, 당시 일월공이라고 불렸습니다. 도우레쓰공이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또 남자 아이들만의 놀이지만, 패자를 승자로 삼는 가위바위보도 했었습니다. 그때 부르던 노래가“♫멍청멍청”이었습니다.
학교도 즐거웠던 추억이 없습니다. 매일 아침 학교에 가자마자 봉안전(천황 및 황후의 사진과 교육칙어 책자를 모신 사당. 모든 학교에 설치되었다)에서 절을 해야 했었습니다. 선생님은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수업에서는 “♫젊은 혈조의 예과련~” 등 군국가요를 부르거나 “귀축미영(미국과 영국을 귀신이나 짐승 비슷한 존재로서 깔보는 구호)” 등 구호를 가르치고 있었으며, 특공대를 찬미하는 교육이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남자아이는 특공대에 입대하기를 꿈꿨습니다. 저는 몸이 허약해서 시험을 봐봤자 안 붙을 거라며 미라 포기했기 때문에, 특공대를 동경하는 기분은 없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