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나가 게이사부로
재외 원폭 피해자 돕기에 온 힘을 다하여
5. 원폭이 떨어진 후의 살림
몇 달 지나서 어머님도 남동생도 활기를 되찾으셨는데, 앞으로도 죽 친척 집에 신세를 진 채 지낼 수도 없었습니다. 오나가쵸의 집은 모두 불에 타서 다 잃어버렸으니, 어머님은 친족들이 많이 사는 후나코시쵸에 거처를 옮기기로 했습니다. 친정 댁 가까이에 작은 집을 임대받아, 저희는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어머님은 요코하마에 살던 무렵 양재 학교에 다니셔서 양재 교사 자격을 취득하셨으니, 저희 집에서 양재를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동네 여성들이 어머님이 하신 교실에 다녔습니다. 그런데도 살림은 몹시 어려웠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6학년이 되자 신문 배달을 하여 가계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남동생은 6학년이 될 무렵까지 정말 몸이 허약해서, 학교를 자꾸 쉬고 병원에 다녀야 했습니다. 그게 방사능 영향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일본 패전 후에 다니던 후나코시초등학교를 졸업하여, 후나코시중학교, 가이타고등학교까지, 모두 집 근처 공립 학교를 다녔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졸업 되면 살림을 돕기 위해 취업하자고 마음먹고 일자리를 구했는데, 좀처럼 찾지 못 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님이 대학에 진학하라고 권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경제 문제 탓에 집에서 다닐 수 있는 국공립대학 외의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공부도 제대로 안 해왔기 때문에 2년 동안 재수해, 1957년에 히로시마 대학 입학 시험을 받아 문학부 중국문학과에 붙었습니다. 게다가 장학금도 수급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등록금이나 서적 값 등이 모자라, 과외를 하거나 야구장에서 자전거 정리하는 등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을 다녔습니다.
졸업 후에는 사실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었으나, 돈을 아끼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에, 집에서 다니기 편한 직장을 고민한 끝에 교직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대학 재학 중에 교직 과정 학점을 땄습니다. 공립 학교는 전근 제도가 있었으며, 어디로 옮길지 모르기 때문에, 중학교 시절의 스승인 니시모토 선생님 권유를 받아, 사학인 히로시마전기고등학교(히로시마현 아키군 카이타쵸)에 국어교사로서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1961년의 일이죠. 당시 이 학교에는 전기과와 기계과가 있었는데, 저는 첫해부터 기계과 1학년 반 담임을 맡았습니다. 그 후 학교는 공업계 학과나 보통과 등을 증설하면서, 남녀공학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처음은 여학생이 적었으나 해가 갈수록 늘었습니다. 그리고 보통과 외의 학과 학생 수가 줄어듦에 따라, 서서히 공업계 학과가 폐지되면서, 제가 퇴직한 1993년 무렵이 되면 보통과를 빼고 다 정리되었습니다. 1999년, 학교 이름도 히로시마국제학원중고등학교로 바뀌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