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
"침묵하지 말자!"소리내어 전하자.
5. 원폭피해 후의 생활
원폭피해를 입은 후, 저는 한 달 정도 설사, 구토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또 제복에 가려지지 않고 노출되어 있던 얼굴, 목, 손발에는 화상을 입었습니다. 저는 10월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아버지도 2~3개월간 설사, 구토가 나왔고 권태감으로 고생하셨습니다.
그 당시 하쓰카이치역 근처에 철도병원 분원이 있었습니다. 저는 철도원이었기 때문에 쉽게 진찰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치료라고 하는 것이 빨간 소독약을 받아와서 매일 화상에 바르는 정도였습니다. 매일 빨간 소독약을 바르고 상처에 딱지가 생기고, 그 딱지를 떼어내면 또 하얀 고름이 나고, 그러면 또 빨간 소독약을 바르는 그런 일상이 번복되었습니다. 화상은 잘 낫지 않았습니다.
목 뒷부분에 입은 화상이 제일 심했는데 원폭피해 후에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부터 고름이 자꾸 흘러내렸습니다. 흘러내리는 고름에서 나오는 악취는 정말 심했습니다. 상처에서 구더기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오이나 감자를 갈아서 상처에 발라 주시기도 했습니다만, 좀처럼 상처가 잘 낫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 제 상처에 파리가 끓지 못하도록 부채로 부쳐 주시기도 하고 젓가락으로 구더기를 떼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께서 “죽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고 계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저에게 ‘죽어라!’라고 하신 말씀은 너무도 힘들어서 고생하는 나를 보고 차라리 죽는 게 더 편한 길은 아닐까 하는 아들을 위한 말씀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아들의 장래를 비관해서 하신 말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인이신 어머니께서는 전통적으로 장남인 저를 중히 여기며 특별 대우를 해 주셨었습니다. 물자가 부족한 전쟁 중에도 어머니께서는 어딘가에서 팥을 얻어다 제 생일날에는 팥밥을 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 입어서 “죽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있자니 제 마음이 너무도 아팠습니다.

병원에서 어떤 사람이 “원폭피해를 입은 사람은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하면 사망한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매일 머리카락을 만져보면서 ‘오늘 하루는 아직 괜찮다!’고 스스로 위안 삼고 있었습니다.
11월 말 아니면 12월 초였습니다. 우리 집 앞을 가끔 지나다니던 일본인 아주머니가 유채꽃씨 기름을 가지고 와서 “화상에 좋다니까 발라 보세요.”라고 건네주고 가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 기름을 매일 제 몸에 발라 주셨습니다. 그 이듬해인 2월인가 3월경에 또 한 병을 가져다주셨습니다. 유채꽃씨 기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점점 구더기도 없어지고 피부가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3월이 되어서야 저는 겨우 직장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동료들 태도가 변해서 제 옆에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원폭증이 전염된다는 잘못된 생각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료들의 태도에 저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18세가 되었을 때, 직장에서 정사원으로 등용한다는 소식을 전해 받았습니다. 그때까지는 연수 기간으로 급료도 일급제로 받고 있었습니다. 정사원이 되면 월급제로 한 달에 57엔 받게 됩니다. 그런데 사무원으로부터 호적등본을 제출하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본국에 신청하면 2개월 정도 걸려서 보내 받을 수 있습니다만, 저는 조선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제출을 미뤘습니다. 그랬더니 사무원이 “에가와 씨! 빨리 제출하세요.”라고 몇 번을 독촉해 왔습니다. 점차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아무한테도 연락하지 않고 급료도 받지 않은 채 제복도 반납하지 않고 일을 그만뒀습니다.
동급생인 시마다[島田] 군이 트럭 운전사를 하고 있었는데 월급 200원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는 운전면허를 따러 갔습니다. 그리고 히로시마현 하쓰카이치시 토목 출장소에서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2년 정도 지났을 무렵, 제가 원폭피해자라는 것이 밝혀지고,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도 들통나게 되어 직장에 계속 다니기 어려워졌습니다. 그 무렵, 우리 가족도 히로시마적십자원폭병원 근처인 히로시마시 나카쿠[中区] 센다마치[千田町]에 집을 지어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10채 정도 조선인이 모여 살면서 조선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동포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트럭 운전사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아버지가 돼지 사육을 시작하겠다고 하셔서 센다마치 집을 팔아서 히로시마역 북쪽에 위치한 히가시구[東区] 와카쿠사초[若草町]로 이사했습니다. 저는 친구들과 브로커를 시작했습니다. 이와쿠니[岩国] 미군 기지에서 미국 중고차를 사 와서 히로시마에서 판매했습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막걸리를 만들어 파시다가 나중에는 소주도 만들어 파셨습니다. 동생들도 토목 작업원으로 일하고 우리 가족 모두가 일했습니다.